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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쓸데없는 사전/황금전설: 성인 이야기

[성인 마르첼로 1세 (Marcellus I), 마르셀로, 마르켈루스] 축일: 1월 16일 / 신분: 교황, 순교자/ 활동연도: +308/9년?

by شيطان؛ جِنّ؛ عِفريت 2023.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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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마르첼로 1세(255년 1월 6일 – 309년 1월 16일)는 308년 5월 또는 6월부터 사망할 때까지 로마의 주교였다. 막센티우스 황제 치하에서 박해로 타락한 기독교인들에게 부과한 가혹한 보속으로 인한 분쟁 때문에  309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같은 해에 죽었고 유세비우스가 계승했습니다. 그의 유물은 로마의 산 마르첼로 알 코르소 제단 아래에 있습니다.

 

선출

304년 마르첼리누스가 죽은 후 한동안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는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고 이듬해 10월 로마에서 막센티우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다시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새로운 주교가 선출되기까지 거의 2년이 걸렸습니다. 308년에  마르켈루스는 처음으로 자신의의 집무실로 들어갔습니다.

 

로마에서 마르첼로는 교회가 가장 큰 혼란에 빠진 것을 알았습니다. 신자들의 집회소와 일부 묘지는 압수당했고, 교회의 일상적인 활동은 중단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오랜 박해와 박해 기간 동안 떨어져 나간 많은 수의 약한 교인들로 인해 교회 내부의 불화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배교자들은 참회를 하지 않고 영성체에 다시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폭력적으로 요구했습니다.

 

교황

<교황 연대력>에 따르면 마르첼로는 교회의 관할을 25개 행정 구역(tituli)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예비 신자들의 세례 준비를 감독하고 공개 고해성사를 지도하는 사제를 각 구역에 임명했습니다. 사제는 또한 죽은 자의 매장과 순교자의 죽음을 기념하는 행사를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7세기 초까지 로마에는 아마도 25개의 "교구" 교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대박해 이후 마르첼로 교황이 로마의 교회 행정구역을 재조직했다는 분명한 역사적 전승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재정비 사업은 배교자를 교회에서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로 야기된 논쟁 때문에 빠르게 중단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교황 다마수스 1세가 전임자를 기리기 위해 쓰고 그의 무덤에 새긴 비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마수스에 따르면 마르첼로가 배교자들의 죄에 대해 규정된 보속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타락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악한 적으로 간주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심각한 분쟁이 발생했으며 유혈 사태와 함께 모든 평화가 사라졌습니다. 반대자 무리의 선두에는 박해가 일어나기 전에도 신앙을 부인한 배교자가 있었습니다. 포악한 막센티우스는 308년 말 또는 309년 초에 교황을 체포하여 추방했습니다.

 

공경

354년 연대기와 다른 로마 당국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축일은 1월 16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날이 그가 죽은 날짜인지 아니면 그가 유배되었던 미지의 장소에서 그의 유골을 다시 가져온 후 묻은 날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5세기의 "Passio Marcelli"는 교황 연대력과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교회 조직의 재건에 분노한 막센티우스는 교황에게 주교의 위엄을 버리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교황이 이를 거절하자 황제는 공공 도로 건설현장에서 노예로 일하라는 선고를 내렸습니다. 9개월이 지난 후 그는 성직자들에 의해 석방되었고, 루치나(Lucina)라는 여인이 Via Lata에 있는 그녀의 집을 "마르첼로의 이름"으로 봉헌하고 미사를 집전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황제가 마르첼로의 성당을 마구간으로 만들고 그곳에서 말을 돌보라는 명령를 내렸습니다. 교황은 그곳에서 힘든 세월을 보낸 후 죽었다고 합니다. 

 

마르첼로가 실제로 주교가 아니라 교황직 공석 기간에 교회 행정을 맡은 단순한 로마의 장로였다는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304년에 순교한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 4월 26일) 밑에서 사제로 활동하며 지도자적 임무를 수행한 성 마르첼루스(또는 마르첼로)가 308년에 교황좌를 계승함으로써 비로소 약 3년 반 동안 비어 있던 베드로(Petrus)의 주교좌가 주인을 맞게 되었다. 자료에 따라 1년 6개월 또는 채 8개월이 안 되는 재위 기간 중 그는 혼란과 분열에 빠진 교회의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박해로 인해 집회 장소와 묘지가 압수되고, 배교자들이 정해진 속죄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다시 신자 생활에 참여하길 요구하는 등 어려운 문제들이 많았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ialis)에 따르면, 그는 로마 교회를 각각 한 명의 사제가 파견되는 25개의 본당으로 재조직하고, 본당 사제를 중심으로 예비신자의 세례를 준비시키고 배교자들에게 규정된 속죄 행위를 실행하도록 했다. 또 새 주교를 서품 하고, 성녀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 반대편인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에 새 묘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교회를 재정비하려는 그의 노력은 배교자들을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로 큰 혼란과 장벽에 부딪혔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쓴 비문에 의하면, 그는 배교자의 처리 문제에 있어서 엄격한 속죄 행위를 요구한 엄격주의자였다. 그로 인해 헤라클리우스를 중심으로 한 배교자들과 신자들 사이에 심각한 다툼이 유혈 충돌로까지 번졌다. 결국 막센티우스 황제는 배교자들의 고발에 따라 성 마르첼루스 교황을 체포해서 평화의 파괴자란 죄목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는 장소가 알려지지 않은 유배지에서 얼마 뒤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박해 기간에 징수되지 않았던 개인 묘지인 성녀 프리스킬라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 교황의 최후에 대한 이런 내용은 “리베리우스 교황표”(Catalogus Liberianus)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순교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를 기록한 5세기의 “마르첼루스의 수난”(Passio Marcelli)과 “연대 교황표”는 다른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성 마르첼루스 교황은 교회를 재조직하고 주교 직분을 지키면서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막센티우스 황제는 루치나(Lucina)라는 후원자가 자신의 집을 봉헌해 세운 ‘마르첼루스 성당’을 마구간으로 개조하고, 교황을 그곳에서 마부로 일하게 했다고 한다. 결국 교황은 신앙을 지키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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