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레미지오(437년경 - 533년 1월 13일)는 라옹이 아직 교구가 아닌 때에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852년에 랭스의 Hincmar 대주교가 그의 무덤에 "459-462에서 그의 죽음까지"라고 비문을 적은 것을 믿는다면 74년 동안 랭스의 15대 주교였습니다.
496년에서 506년 사이의 성탄절에 클로비스 1세와 그의 수행원인 3,000명의 프랑크 전사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Hincmar에 의해 프랑크족의 사도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가족
성 레미지오는 때때로 Remigius(노 젓는 사람), Remedius(치료제)라는 라틴어 기원의 기독교식 이름으로 불립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라옹(Laon) 근처의 세르니앙라오누와(Cerny-en-Laonnois)에 있는 유력한 갈로-로망(Gallo-Roman)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라옹 백작(Émile de Laon, Emilius)과 성녀 킬리니아(Saint Céline)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882년 이전에 Hincmar가 쓴 레미지오의 일생에 따르면, 맹인 은둔자 Saint Montan(Montanus)가 그의 어머니에게 그의 출생을 예언했다고 합니다. 이 맹인 은둔자는 레미지오가 태어난 직후에 돌아와 셀린느의 모유 덕분에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레미지오는 아마도 그의 가정환경 덕분에 랭스에서 공부했고, 겨우 스물두 살에 랭스의 주교로 선출되었습니다. 레미지오의 형제인 성 프린치피오(Saint Principe, Principius)는 이미 수아송(Soissons)의 주교였습니다.
클로비스의 세례
랭스 교회의 신성한 병 중 하나인 수아송 성유병에 대한 이야기는 레미지오와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 1세 사이에 존재했던 호의적인 관계를 증명해 줍니다.
레미지오는 클로비스의 개종에 대한 정보를 얻고 성스러운 병의 도움과 부르고뉴 왕 칠페리크 2세의 딸인 부르고뉴 공주 클로틸드의 영향으로 496년에서 506년 사이의 성탄절 만남에서 클로비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클로비스의 세례는 갈리아와 프랑스의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며 1027년 앙리 1세로부터 오를레앙의 루이 6세, 샤르트르의 앙리 4세, 루이 18세를 제외한 프랑스의 모든 왕이 랭스에서 즉위했습니다.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은 후 이교도였던 누이 알보플레드와 아리우스주의 추종자인 랑테쉴드가 개종했으며, 그다음은 충실한 병사들이었습니다. 투르의 그레그와르 주교의 역사에 따르면, 3,000명의 프랑크인들이 클로비스 두 누이인 알보플레드, 랑테쉴드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황금전설에 따르면 클로비스의 이마에 기름을 부을 수 있는 성유가 없었기 때문에 비둘기로 변한 성령이 성스러운 병에 성유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 병은 나중에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에서 기름 부음을 위해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무덤
레미지오는 나중에 생레미(Saint-Remi) 바실리카가 된 작은 Saint-Christophe 교회에 묻혔습니다. 852년, Hincmar는 성인의 유물을 숭배하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최소한의 부분만 Sainte-Marie de Reims로 옮겼습니다. 900년에 에르베 대주교는 프랑스 혁명 때까지 숭배의 대상이 된 생 레미의 유물을 교체했고 시신은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숭배
랭스 대교구에는 성 레미지오를 기리는 본당이 90개 이상 있습니다. 많은 프랑스 마을에도 같은 이름의 본당이 있습니다. 매년 96개의 기념비적인 샹들리에의 조명이 많은 순례자와 관광객을 랭스의 생 레미 수도원으로 끌어들입니다.
<출처: 위키백과(https://fr.wikipedia.org/wiki/Remi_de_Reims)>
♧♧♧♧♧♧♧♧♧♧♧♧
성 레미기우스(또는 레미지오)는 437년경 프랑스 북서부 피카르디(Picardie) 지방 랑(Laon) 근교의 세르니앙라오누아(Cerny-en-Laonnois)에서 갈로로망(Gallo-Roman)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밀리우스(Aemilius)는 랑의 백작이었고 어머니는 성녀 킬리니아(Cilinia, 10월 21일)이고, 동생도 나중에 수아송(Soissons)의 주교가 된 성 프린키피우스(Principius, 9월 25일)이다. 일찍이 랭스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성 레미기우스는 학식이 뛰어나고 성덕이 높았기 때문에 불과 22살인 459년에 랭스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70년 이상 주교직을 수행하며 갈리아 지역 동쪽을 점령한 프랑크족의 개종을 위해 힘썼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498/9년경 이교도로 북부 프랑스 지방을 다스리던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인 클로비스 1세(Clovis I)를 개종시킨 것이다. 역사가인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정확한 연도를 적지는 않았으나 성탄절에 클로비스 1세가 전사 3,000명과 함께 랭스의 주교인 성 레미기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기술하였다.
클로비스 왕의 세례는 프랑크족의 복음화뿐만 아니라 서방 교회의 역사에 커다란 변화의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그의 개종 동기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성녀 클로틸다(Clotildis, 6월 3일)의 영향과 로마 귀족 출신으로 랭스의 주교인 성 레미기우스와의 협력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클로비스 왕은 갈리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중 알라마니(Alamanni)족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고, 그의 아내인 성녀 클로틸다가 믿는 하느님이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면 그 하느님을 믿겠다고 서약했었다. 그리고 496년 톨비악(Tolbiac)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498년 또는 499년 성탄절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9세기에 전해진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클로비스 왕의 세례식 때 흰 비둘기 모습을 한 천사가 성 레미기우스 주교에게 하늘에서 가져온 성유병을 건네주었고, 성 레미기우스가 클로비스의 이마에 그 성유를 발라주었다고 한다. 이로써 클로비스는 구약 시대의 왕들처럼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왕이라는 전설이 생겼고, 후대 프랑스의 왕들도 즉위식 때 이 거룩한 기름을 바르는 도유식을 대부분 거행하였다.
성 레미기우스는 탁월한 행정가이자 선교사였다. 그는 정통교회와 교리의 수호자로서 아리우스파(Arianism)를 적극적으로 몰아냈고, 어느 아리우스파 주교를 회개시킨 사례도 있었다. 그는 교황의 허가와 클로비스 왕의 도움을 받아 투르네(Tournai), 캉브레(Cambrai), 테루안(Therouanne), 아라스(Arras), 랑(Laon)에 교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탄원하여 수아송 성당에서 탈취한 성작(聖爵)을 돌려주게 할 만큼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성 레미기우스는 533년경 100년에 가까운 삶을 마치고 1월 13일 랭스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힘찬 주교였고, ‘프랑크 민족의 사도’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황 레오 9세는 1049년 성인의 유해와 유품을 랭스 대성당 근처에 있는 생레미(Saint-Remi) 수도원으로 옮겼다. 옛 “로마 순교록”은 1월 13일에 세상을 떠난 성 레미기우스의 축일을 그의 유해가 이장된 날인 10월 1일에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 레미기우스가 선종한 날인 1월 13일로 축일을 옮기고, 클로비스 왕에게 세례를 주고 프랑크족의 개종을 위해 70년 이상 주교직을 수행한 후 놀라운 삶을 마친 그의 성덕을 칭송하였다. 성 레미기우스는 프랑스에서 레미(Remi)로 불린다.
<출처: 가톨릭 굿뉴스 성인 목록(https://maria.catholic.or.kr/sa_ho/list/list.asp?menugubun=sain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