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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 보이는 것이 있을까?/투르의 성 마르티노 길(Le chemin de Saint-Martin)

[투르의 성 마르티노(Saint Martin) 순례길] 유럽의 전도자, 투르의 성 마르티노(Saint Martin de Tours)

by شيطان؛ جِنّ؛ عِفريت 202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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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절제를 말한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 서양 최초의 수도원 창시자, 복음을 전하는 주교이자 치유자...... 성 마르티노는 확실히 특별한 성격이었습니다. 마르티노는 또한 기독교 국가가 된 새로운 제국 시대의 첫 번째 성인이기도 합니다.

 

아미앵, 354년 겨울

 

한 군인이 요새화된 도시의 성문을 통과하려고 했습니다. 성문 옆에서 한 거지가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군인 마르티노는 이 도시의 비참한 상황에 충격을 받습니다. 황제의 보호 아래 유럽에 퍼지고 있는 동방의 새로운 종교를 알고자 하는 열렬한 예비 신자는 가능한 한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정기적으로 급여에서 돈을 떼어 나눠주고, 노예를 동등하게 대우했습니다. 

 

그날 성인은 칼을 휘둘러 자신의 짧은 외투인 클라미를 찢고 그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곧바로 거지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은 몇몇 행인들의 수치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에 일어난 많은 기적보다는 덜 특별합니다. 또한, 이 일은 성인의 전기에서 단지 몇 줄을 차지할 뿐이지만 성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잘 알려진 행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끊임없이 모든 시대의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성인은 기독교 초기의 많은 성인들과는 달리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제국 근위대의 기사

 

성인은 336년 또는 316년에 판노니아(Pannonia) 지방의 사바리아(오늘날 헝가리의 솜바텔리)에 있는 이교도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출생 연도에 대한 이견이 있지만 마르틴의 후계자 중 한 사람인 투르의 그레고리 주교(538-594)는 별 문제 없이 316년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당시 관례대로 성인은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 황실 근위대의 기사가 되어 갈리아로 갔습니다. 아미앵( Amiens)에서의 일이 있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티노는 라인강 왼쪽 강둑에 있는 Worms에서 야만인과 싸우는 것보다 군대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당시 유명한 푸아티에(Poitiers)의 힐레르(Hilaire) 주교를 찾아갔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306-337)의 통치 이후 기독교인들은 자유롭게 종교를 믿을 수 있었지만, 전통적인 이교가 계속해서 널리 퍼져있는 있는 갈리아에는 약 30명의 주교단만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제국 전역에서 아리우스파와의 논쟁으로 주교들은  분열되어 있어고, 성인은 현재의 일리리아에 살고 있던 부모를 개종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이탈리아에 머물 때는 이집트의 수도사들이 실천하고 있던 금욕주의 생활을 경험한 후, 그는 푸아티에로 돌아왔습니다. 멘토인 힐라리의 승인을 받은 성인은 360년에 근처 리구게에 갈리아 최초의 수도원을 세웠는데, 수도원은 라브다 신에게 바쳐진 갈로-로마 성소의 폐허 위에 지어졌습니다. 

 

투르 주민의 요청

 

성인은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은둔자로 10년 동안 수도원에 머물렀습니다. 각자는 별도의 방에서 생활하면서 식사 시간과 기도 시간에만 모였습니다. 

 

성인은 죽어가던 제자 중 한 명과 어린 노예를 소생시켰고, 이후 이 지역에 치유자로서의 명성이 널리 퍼졌습니다. 371년 성직자들은  그의 덥수룩하고 더러운 외모 때문에 주교로 세우기를 거부했지만 투르 주민들은 성인을 주교로 세우라고 요구했습니다. 

 

앙투안-프레데릭 형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당시에는 주교가 고위 귀족 가문에서 선출되었습니다. 은둔자를 주교로 선출하는 것은 놀라운 스캔들이었다! » 성 마르티노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그의 오랜 생애 동안 여러 번 그랬듯이, 금욕주의에 대한 갈증과 대중을 복음화해야 하는 필요성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주교의 집을 떠나 루아르 강 반대편 마르무티에에 있는 새로운 은둔처에 정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마르티노는 나무로 지은 감방에 살았으며, 많은 형제들도 같은 방식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교는 계속해서 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주변에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파리에서 나병환자를 고쳤고, 트리어(현재 독일)에서 몸이 마비된 젊은 여성을 고쳤으며, 론 강 비엔에서 그의 제자 폴린 드 놀을 고쳤습니다. 또한 악마를 쫓아내고, 뱀을 물리치고, 신성한 갈리아 나무를 부수거나 우박을 멈추게 했습니다. 또한, 트리어에 있는 황제의 궁정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발렌티니아누스 1세(364-375), 막시무스(383-388)와 토론했습니다. 성인은 이단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스페인 주교 프리실리안과 그의 제자들을 변호했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영향력 상실과 죽음

 

이 실패 이후 마틴은 주교단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열렬한 제자도 있지만 적도 많습니다. 그의 후계자 Brice가 성인의 무덤에 기적을 일으킨 순교자들을 기리는 장례식 예배당인 "순교당"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397년 11월 8일 전교를 위해 방문한 캉드에서 사망했습니다. 푸와투 주민들과 트루 주민들은 그의 유해를 놓고 싸웠습니다! 주민들 일부는 이미 마르티노를 성인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의 순교자였습니다. 그러나 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브리스 주교는 마틴의 사후 인기를 억제하려고 시도했지만, 그의 후계자 중 한 명인 페르페투우스는 460년에 그의 무덤 위에 큰 대성당을 세웠습니다. 507년에 아리우스파를 정복한 프랑크 왕 클로비스는 마르티노를 왕조의 수호자로 선포했습니다. 프랑스의 수호성인의 한 명인 그는 군인, 재봉사, 가난한 이, 가축과 목동의 수호자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https://www.lepelerin.com/chemins-pelerinages/le-chemin-de-saint-martin-4169/saint-martin-de-tours-evangelisateur-de-leurope-4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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