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귀족 가문이자 그리스도교 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성녀 바울라는 15세 때인 362년 율리아 가문의 이교도 톡소시우스(Toxotius)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은 이상적인 부부로 존경받았는데, 379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엄격한 절제생활과 더불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녀는 성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와 안티오키아(Antiochia)의 바울리누스(Paulinus)를 통하여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히에로니무스의 사업에 적극 가담하여 후원하였다. 384년경 그녀의 큰딸인 블레실라의 죽음으로 한때 비통에 잠겼으나, 다음 해에 그녀는 둘째 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과 함께 로마를 떠났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더불어 성지를 순례한 뒤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베들레헴에 정착하였다. 성녀 바울라와 에우스토키움은 구호소와 수도원을 세웠는데, 바울라는 수도원을 지도하였다. 그녀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보조자였으며, 성서 사업에 큰 공헌을 하였다. 성녀 바울라는 402년경에 병에 걸려 2년 후인 404년 1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성녀 바울라는 과부들의 수호자이다.
<출처: 가톨릭 굿뉴스, 성인>
♤♤♤♤♤♤♤♤♤♤♤♤♤♤♤♤♤♤♤♤
바울라의 초기 생애에 대한 정보는 주로 제롬의 편지에 기록이 있습니다. 편지에 따르면 그녀가 호화로운 삶을 살았고 훌륭한 지위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로마의 파울라(AD 347–404)는 고대 로마의 성자이자 초기 사막의 어머니였습니다. 아가멤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부유한 원로원 가문의 위대한 일족에서 Blesilla와 Rogatus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6세에 귀족 톡소시우스(Toxotius)와 결혼하여 Blaesilla와 Paulina, Eustochium, Rufina의 네 딸을 낳았고 또한, Toxotius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32세에 미망인이 된 그녀는 교황 다마수스 1세의 친구이자 로마에서 온 기독교인 성녀 마르첼라와 더욱 가까워졌고, 마르셀첼라는 그녀를 스트리돈의 성 히에로니무스에게 소개했습니다. 바울라는 새로운 영적 스승인 성 마르첼라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집을 작은 수도원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녀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배우러 오기도 했지만 그 대가로 오리겐의 글을 라틴어로 번역해 달라고 제안합니다.
384년에 큰딸 블레질이 죽었고, 그녀가 고통을 견디도록 돕기 위해 히에로니무스는 두 자녀가 죽은 후 예루살렘으로 떠난 성녀 멜라니아의 모범을 따르라고 격려했습니다.
히에로니무스가 385년 로마를 떠나 성지로 갈 때 바울라는 딸 에우스토키움(Eustochium)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베들레헴에 정착하기 위해 돌아가기 전에 하 이집트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듬해에 그녀는 제롬과 함께 이중 수도원을 세웠는데, 수도원의 남성 공동체는 히에로니무스가 처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수도원이 완공되고, 수도원은 육체노동과 식사 중에 남녀를 서로 분리했지만, 같은 장소에서 기도했습니다.
바울라는 여성을 사회적 지위에 따라 세 그룹의 공동체로 세분화하고 순례자를 위한 무료 호스피스 설립에 기여합니다. 수도원에서 봉사하는 동안 그녀는 히에로니무스의 지도하에 구약과 신약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금욕적인 헌신을 유지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나중에 그녀의 딸 에우스토키움이 수녀의 수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모두 예루살렘의 주교인 요한 2세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 오리게니즘 논쟁과 같은 당시의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성녀는 베들레헴의 탄생 동굴에 묻혔다고 합니다. 9세기 초 마그누스 대주교가 성인의 유물을 상스에 있는 생테티엔 성당으로 이전한 것을 받았다고 합니다.
<출처: 위키백과(https://fr.wikipedia.org/wiki/Paule_de_Rome)>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