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성 예로니모가 이야기를 전한 테베의 바오로 또는 은둔자 성 바오로는 성 안토니우스와 함께 수도원 제도의 창시자 중 한 명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그가 살던 이집트 사막 주변에서 발전했으며 훨씬 후인 5세기에 중요한 수도원이 세워졌습니다. 491년 로마에서 교황 젤라시우스 1세 시절에 시성 되었고 교회에서 최초의 은둔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일생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의 기록에 따르면 은둔자 성 바오로는 227년 경상 이집트에서 태어나 345년경 테베 사막에서 사망했습니다. 황금 전설에 따르면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를 피해 60년 동안 동굴에서 은둔하다가 287년경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열다섯 살에 부모를 여의고 매형이 유산의 빼앗으려고 그를 박해자들에게 넘겨주려 했다. 그는 서기 250년 경 스물두 살에 세상을 떠나 숨기 살기를 원했고 백열세 살까지 사막에서 91년 동안 은둔자로 살았다.
성인의 사막의 산에 맑은 샘과 종려나무가 있는 근처의 동굴에서 살았는데, 종려나무 잎사귀는 그에게 옷이 되었고 열매는 그가 43세가 되어 까마귀가 매일 빵 반 덩어리를 가져오기 시작했을 때까지 유일한 식량 공급원이었습니다.
테베의 바오로 342년경에 성 안토니우스가 꿈에서 나이 든 은둔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갔기 때문에 후세에 알려졌습니다. 성 예로니모는 안토니우스와 바오로가 만나 것이 바오로가 113살 때였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만나고 점심시간 다가오자 까마귀가 두 사람에게 빵 한 덩어리를 가져왔고, 바오로는 이것이 하나님이 매일 그에게 식사를 제공하신 방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루 밤낮을 함께 기도하고 아야기를 나눈 뒤, 성 바오로는 성 안토니우스에게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자신에게 준 망토를 수도원에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날 돌아온 안토니우스는 망토로 바오로의 시신을 감싸고 안토니우스와 함께 남아 있던 두 마리 사자가 파낸 구덩이에 묻었습니다. 대신 종려나무 잎으로 짠 바울의 옷을 가지고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성 안토니우스는 1년에 두 번 부활절과 오순절에 그것을 입고서 바오로를 기렸습니다.
<출처: 위키백과(https://fr.wikipedia.org/wiki/Paul_de_Th%C3%A8bes)
후세와 유물
113세 전후로 매우 늦게 세상을 떠난 테베의 성 바오로는 수도원을 세우지 않았지만, 그가 죽은 직후 그의 삶을 모방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은둔자 생활의 모범을 따랐습니다. 성 바오로 수도원은 콥트교인들이 바오로가 살았던 동굴과 유해가 처음 묻힌 장소라고 믿는 홍해 근처의 이집트 동부 사막 산에 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곳에 세워진 성 바오로 동굴 교회는 수도원 제도의 아버지인 성 안토니우스와 최초의 은둔자인 바울이 만난 장소를 표시합니다.
12세기에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1143-1180)의 명령에 따라 바오로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서 페리블렙토스의 성모 수도원에 안치했습니다. 나중에 베니스로 옮겨졌다가, 마침내 헝가리로 옮겨져서 13세기 초에 최초의 성 바오로 은둔자 기사단이 창설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 부다 궁전의 왕실 예배당에 모셔졌다가, 1381년부터 성스러운 은둔자를 기리기 위해 온 많은 헝가리 및 외국 순례의 중심지가 된 Budaszentlőric 수도원에 모셔졌습니다.
♧♧♧♧♧♧♧♧♧♧♧♧
성 바오로(Paulus)는 이집트의 테베(나일강 중류에 있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에서 부유한 그리스도인 부모에게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앙교육과 일반교육을 충분히 받고 성장한 그는 15세 때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게다가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박해를 피해 누나의 소유지에 숨어 살았다. 그런데 이교도였던 매형이 그가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빼앗으려고,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법정에 고발하려는 음모를 알고는 22세의 청년이 된 성 바오로는 집을 나와 광야로 피신했다. 박해가 끝날 때까지 인적이 드문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으로 지내던 그는 어느새 광야의 고독한 삶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박해가 끝난 후에도 광야에서 평생을 보낼 결심을 하고 자신에게 알맞은 은수 생활을 고안해 나갔다. 그는 43세까지 한 동굴에 머물며 그 옆에 있는 한 그루의 종려나무 열매와 샘물만으로 생활했다. 그런데 그 후 엘리야 예언자와 같이 신비하게도 까마귀 한 마리가 매일같이 빵 반 조각을 물어다 주어 그것으로 일생을 보낼 수 있었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가 “성 바오로의 전기”(Vita Pauli primi eremitae)를 기록했는데, 그에 따르면 성 바오로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사막의 교부이자 은수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집트의 성 안토니우스(Antonius, 1월 17일)가 90세가량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왔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이 거룩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빵 한 덩어리를 떨어뜨리고 갔다. 성 바오로는 놀란 성 안토니우스에게 “지난 60년 이상 매일 빵 반 조각을 가져다주더니, 오늘은 당신이 왔기 때문에 한 덩이의 빵을 가져다주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이어서 성 안토니우스에게 자신을 위해 임종 기도를 부탁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 주교에게 받은 망토로 자신의 유해를 덮어달라고 부탁했다.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가 그에게 있었음을 깨달은 성 안토니우스는 서둘러 망토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미 성 바오로는 기도하듯이 바위 위에서 하늘을 향해 양손을 펴고 무릎을 꿇은 상태로 죽어 있었다. 성 안토니우스는 가져온 망토로 그의 유해를 둘러싸고 종려나무 밑에 매장해주려 했는데, 땅을 팔 도구가 없어 곤란해하고 있자 두 마리의 사자가 나타나 땅을 파주었다고 한다. 성 바오로의 장례를 지낸 성 안토니우스는 종려나무 잎을 꿰매 만든 그의 의복을 가지고 돌아와 중요한 축일마다 그것을 입었다. 그러면서 그와 같은 거룩한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마도 성 바오로는 113세 정도까지 살았는데, 무려 90년 이상을 은수자로서 광야에서 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은수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2월 9일에 기념한다.
<출처: 가톨릭 굿뉴스 성인 목록(https://maria.catholic.or.kr/sa_ho/list/list.asp?menugubun=sain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