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베스테르 1세 또는 실베스터 1세는 로마에서 태어나 335년 12월 31일 로마에서 사망했으며 314년 1월 31일에 주교직에 오른 로마의 제33대 교황(주교)였습니다.
아를과 니케아 공의회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통치와 동시대에 임한 이 22년의 교황직은 도나투스파 위기와 아리우스파 위기의 시작과 겹치는 시기입니다. 또한, 실베스테르 1세가 큰 역할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건에서 제국의 후한 조치로 인해 로마는 기독교 도시의 모습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교황권의 역할을 확대하고 중세에 걸쳐 교황의 현세 권력을 합법적으로 확립하는 콘스탄티누스 기증(문서)을 만들어내는 기초 역할을 하는 장면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세례자로 묘사됩니다.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동로마 황제(비잔틴제국 황제)의 4세기 칙령인 것처럼 위조한 문서다. 내용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면서 로마 도시와 서방 제국을 교황 실베스테르 1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동방 제국의 황제권을 보유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문둥병을 치료받아 회심하고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 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한다. 칙령문서는 13세기부터 시작하여 중세기간 동안 세속의 황제에 대한 기독교의 교황의 우위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교황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다.
전기적 요소
실베스테르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그의 전기 요소는 후기 성인전 기록에 의해 가려지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태어난 날과 지역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실베스테르는 아마도 로마 출신일 것입니다. 라피누스라는 장로의 아들인 그는 마르첼린 주교 아래서 사제직에 올랐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를 겪었을 것입니다.
아를 공의회
케실리안(Caecilian)이 카르타고 주교좌에 선출됨으로써 시작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의 요청으로 밀티아데스(Miltiades) 주교가 313년에 소집한 로마 소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도나투스파 다시 황제에게 호소했습니다. 황제는 314년 8월 Arles에서 서부 지방의 모든 대표자를 모은 회의를 소집합니다. 로마 주교의 권위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황제는 시라쿠사 크레스투스의 주교에게 전반적인 감독을, 아를의 주교 마리누스에게 의장을 맡겼다. 이 중요한 공의회는 "로마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릴 예정이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제 두 명과 부제 두 명을 파견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
319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가 발전시킨 교리는 곧 동방 교회를 심하게 찢어 놓는 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단언하는 급진적인 교리를 320년경에 지역 대회를 소집한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주교가 반대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중재가 실패한 뒤 코르도바의 오시우스 주교에게 위기를 해결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오시우스는 325년 5월 니케아에서 전체 주교단의 총회를 소집하고 주재했습니다. 공의회는 주로 동부 고위 성직자들을 소집했고 실베스트르는 고령을 이유로 다시 한번 참석을 거절합니다. 대신 비투스(Vitus)와 빈첸시오(Vincentius)를 교황특사로 대신 파견하고 교황특사들을 통해 공의회의 결의를 승인하였다.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주교 사이에 합의된 부활절 날짜의 제정을 포함한 전례 규범 등을 제정했습니다. 하지만 실베스트르는 공의회 권고와 달리 326년에 알렉산드리아와 다른 부활절 날짜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황제와의 관계
실베스트르의 재위 기간에 로마 교회는 그리스도교 로마를 건설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호의와 아량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황제는 수많은 종교 건물을 짓고 땅을 기부했습니다. 특히 라테라니 사유지에 지은 콘스탄티니아나 대성당(현재의 라테라노 성 요한 대성당), 헬레나 궁전 옆에 있는 세소리아나 바실리카(현재의 예루살렘 성 십자가 바실리카), 파울리 바실리카(현재 성벽 바깥에 있는 성 바오로 대성당) 등이 있습니다. 통치 후반기인 333년경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위키백과(https://fr.wikipedia.org/wiki/Sylvestre_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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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성 실베스테르는 로마 사람으로 루피누스(Rufinus)라는 신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313년에 신앙의 자유를 얻고 평화를 획득한 다음인 314년 1월 31일 교황 성 멜키아데(Melchiades, 12월 10일)를 계승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그는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에 21년간 교황직을 수행했지만, 그의 생애나 활동에 대해 정확한 자료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상당 부분 비역사적이고 전설적인 이야기들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회 내에서 펼친 업적에 가려진 탓이기도 하다.
성 실베스테르 교황은 즉위 초기부터 도나투스주의(Donatismus)와 아리우스주의(Aranismus)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318년 도나투스파 이단에 대항해 아를(Arles)에서 열린 지역 공의회에 사제 두 명과 부제 두 명을 파견했다. 이 회의에서는 도나투스파를 단죄하고, 부활절 날짜를 고정하는 문제와 영성체와 세례성사에 대한 내용 등을 다뤘다. 이를 통해 로마 교회의 주교가 전체 서방 교회에서 갖는 수위권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도나투스주의가 서방 교회에서 큰 이단으로 등장했다면, 동방 교회에서는 아리우스주의 이단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그래서 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개최를 선포한 니케아(Nicaea) 공의회에도 고령으로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특사를 파견해서 아리우스 이단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재천명했다.
이 외에도 그는 교회 규율을 정비해 발표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움과 증여로 로마에 많은 성당을 건축했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황제에게 선사받은 라테라노 궁을 개조해 라테라노 대성당과 세례소를 건축했고, 황후인 헬레나(Helena, 8월 18일) 성녀의 궁 옆에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대성당을 지어, 성녀가 예루살렘에서 직접 발견한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를 모셔 놓았다. 또한 사도 바오로(Paulus, 6월 29일)의 유해를 모신 성 바오로 대성당과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8월 10일) 대성당, 성녀 아녜스(Agnes, 1월 21일) 대성당 등을 건축했다. 그는 335년 12월 31일 선종했는데, 그 장소는 알 수가 없다. 그의 유해는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Prischilla)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1월 2일에 기념한다.
<출처: 가톨릭 굿뉴스 성인(https://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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