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아람어로 Tʾōmā)는 갈릴리 출신의 유대인이자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입니다. 사도의 이름은 세 개의 공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사도 목록에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여 종교적 불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전승에 따르면 그는 니시비스의 아디아베네에서 사도로, 그다음에는 탁실라의 인도-파르티아 왕국에서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을 교회의 창시자로 간주하는 남인도에도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52년에 인도에 도착한 그는 70년대에 현재 밀라포르(Mylapore) 근처의 성 토마스 산(Mount Saint-Thomas)이라고 불리는 언덕에서 순교했습니다. 그의 무덤은 첸나이(마드라스, 인도 타밀주)의 성 토마스 대성당 지하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사도 토마스는 대부분의 고대 기독교 문헌에 등장하며, 토마스 복음서와 토마스 행전이라는 두 개의 외경이 그와 관련이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그의 다른 이름은 아람어로 "쌍둥이"를 의미하며 그리스어 디디모스(Didymos)로 번역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로 부르고, 시리아 전통에서는 유다 도마로, 교부들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로 부르기도 합니다. 토마스는 주후 2세기까지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토마스라는 이름은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인물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복음서에서는
공관복음서에서 토마스는 사도들의 명단 외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우월한 속성을 부여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할 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 11:16)"라고 열렬하고 용맹하게 자신을 드러냅니다. 최후의 만찬에 이어지는 대화에서도 그의 비판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예수께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 14:4)"라고 말했을 때 토마스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에서 그에게 독특한 위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의 불신앙입니다. 같은 복음서에서 토마스는 십자가의 흔적을 보기 전까지는 믿기를 거부합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 20:24-29)
전승에 따르면
에베소와 마케도니아의 빌립보에 많은 고대 문헌과 석기 비문이 있는 지역 전승에 따르면, 에데사(Edessa) 왕은 예수에게 그의 왕국에서 설교하도록 초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당분간 거기에 갈 수 없지만 제자 중 한 사람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토마스는 예수의 신봉자 중 한 명인 앗다이를 아브가르 왕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에데사 공동체는 37년경 팔레스타인의 바냐스에서 온 Addaï라는 사도 토마스의 제자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토마스 복음서를 "독립적인 아람어 흐름"에서 유래하고 "결코 통일된 실체를 구성하지 않는" "시리아 기독교"와 연결시키는 데 동의합니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이 복음서가 정경 복음서가 기록된 시기(70-115)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복음서가 만들어진 도시는 아브가르 왕이 다스리던 작은 왕국 Osrhoene의 수도인 에데사일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의 기독교는 로마 교회나 로마의 아시아 속주의 "헬레니즘 기독교로부터 독립"되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시리아어(아람어 방언)에 있지만 신약성서에는 없는 도마행전 본문에 따르면, 37년경에 처음으로 안디옥을 떠나 바르톨레메오 또는 바 톨마이(톨마이의 아들)와 함께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당시 파르티아, 아디아베네, 아르메니아가 지배하던 페르시아 북쪽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 다음 간다라(Gandhara)에서도 곤도파레스 1세(Gondophares I) 왕과 왕궁을 짓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방법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1834년 캘커타에서 그의 이름으로 주조된 동전이 발견될 때까지 곤도파레스 1세(Gondophares I) 왕은 "도마 복음"이라는 외경 기독교 텍스트에서만 언급되었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모님의 승천을 목격한 뒤에, 성 토마스는 배를 타고 남부 인도로 가는 두 번째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52년 말에 케랄라의 크까 노르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공동체가 살았던 곳이었습니다. 그는 고위 카스트 계급 사람들과 왕실의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들은 인도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을 형성했습니다. 52년부터 63년까지 그는 타밀 나두와 스리랑카뿐만 아니라 케랄라에 총 7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황금전설에 따르면
성 토마스가 가이사랴에 있을 때 "주님"에 의해 인도로 보내졌습니다. 도마행전에서처럼 "인도의 왕" 곤도파레스 1세의 장관인 아바누스가 예수에게 "능숙한 건축가"를 지명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도마행전에서처럼 토마스는 인도에 가기를 꺼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바누스와 함께 인도에 도착한 토마스는 왕을 위해 "웅장한 궁전을 설계합니다. 왕은 사도에게 "상당한 보물"을 준 다음 "다른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왕이 없는 2년 동안 토마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든 재물"을 나눠주고 열정적으로 설교에 매달려서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습니다. 왕이 돌아왔을 때 사도는 천국에 궁전을 지었지만 왕이 개종해야만 그것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사도를 그를 Abanus와 함께 감옥에 가두어 가죽을 벗기고 불태우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죽은 지 나흘이 된 왕의 동생이 부활해서 천국을 여행하는 동안 토마스가 곤도파레스 왕을 위해 하늘에 지은 궁전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한 뒤에 사도는 풀려납니다. 사도는 풀려났고 왕은 용서를 구하고 개종합니다.
그런 다음 성 토마스는 북인도로 떠났고 그곳에서 그는 많은 기적을 행했으며 심지어 왕실의 여성들을 개종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지역의 왕이 그에게 우상을 섬기도록 강요했지만, 그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숭배하면서 우상에 있는 악마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자 조각상들이 밀랍처럼 녹았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은 사도를 칼로 찔러 자기 신에게 상처 입힌 것을 복수합니다.
유물과 숭배
전례적으로 1969년부터 로마 가톨릭과 시리아 교회에서는 7월 3일을 축일로 하고 있으며, 특히 인도에서는 축일이 매우 특별합니다. 그리스 교회는 10월 6일을 기념합니다. 9세기에 성 토마스 축일이 로마 달력에 삽입되었을 때는 12월 21일에 배정되었습니다. 같은 날 성인의 유물은 첸나이(인도의 고대 마드라스) 근처 미라포르(Mylapore)의 마리나 해변 해안을 따라 에데사 시로 옮겨졌습니다.
성인은 의심을 알면서도 믿음 안에서 인내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수호성인입니다. 그의 유해는 인도 첸나이에 있는 성 토마스 대성당의 토굴에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유물 중 일부는 392년에 에데사로 옮겨졌을 것입니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의 유해는 현재 모술(예전의 니네베)에 있는 교회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더 인정받는 다른 전승에 따르면, 성 토마스의 유해는 그리스 키오스 섬으로 옮겨진 뒤에 1258년 메소포타미아 묘비와 함께 이탈리아의 오르토나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출처: 위키백과(https://fr.wikipedia.org/wiki/Thomas_(ap% C3% B4 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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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성 토마스는 아마도 갈릴래아 출신인 듯하며 ‘쌍둥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토마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쌍둥이’라는 뜻을 가진 ‘토암’이나 ‘타우마’의 변형으로, 그리스어로는 같은 뜻을 가진 ‘디디무스’(Didymus)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리스어 문화권에서는 성 토마스를 디디무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일부 위경 문헌에서 그의 실제 쌍둥이 형제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지만, 단지 ‘쌍둥이’란 뜻을 지닌 ‘토마스’란 이름의 사도라고 볼 수 있다. 성 토마스는 열두 사도 중의 한 명이지만 언제 그리고 어디서 사도로 뽑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공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열두 사도의 명단을 언급할 때 등장하고 있다(마태 10,3; 마르 3,18; 루카 6,15; 사도 1,13).
요한복음은 성 토마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 네 번의 사건을 기록하여 비교적 그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11,1-16; 14,1-6; 20,24-29; 21,1-14). 이 중 세 군데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라고 그를 지칭하고 있다. 첫 번째로 그는 베타니아에 사는 성녀 마르타(Martha)와 마리아(Maria)의 오빠인 성 라자루스(Lazarus, 7월 29일)가 죽음에서 부활할 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길에 대해 말씀하실 때,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여쭈어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세 번째는 가장 잘 알려진 사건으로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고 했을 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 성 토마스가 제자들과 함께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시어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자 성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며 장엄하게 신앙을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성 토마스의 신앙 고백은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명백하게 고백하는 유일한 예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도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제자와 함께 그 현장에 있었다.
이후 성 토마스의 행적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고 전승을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다. 교회사가 에 우세비우스(Eusebius)와 다른 이들에 의해 전해진 초기 전승에 따르면, 성 토마스는 나중에 파르티아(Parthia, 고대 이란의 왕국)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또 다른 옛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인도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이 전승은 성 토마스가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으로 인도로 갔고, 그곳에서 목수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는 인도-파르티안 왕국을 세운 곤도파레스 1세(Gondophares I) 왕이 준 왕궁 건축 기금을 모두 불쌍한 이들에게 나눠준 뒤 하늘나라에 왕궁이 세워져 있다고 선포하여 감옥에 갇혔다. 기적적으로 풀려난 그는 인도 남서 해안지역인 말라바르(Malabar)로 가서 7개의 교회를 세우고 선교 활동을 본격화해 많은 인도인에게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그러다가 72년경 마드라스(Madras) 교외 밀라포르(Mylapore) 근처에서 힌두교 사제들에 의해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한다.
첸나이(Chennai, 옛 마드라스)에는 그가 순교하고 묻힌 무덤 위에 있었던 성당 위에 19세기말 포르투갈 교회가 재건한 성 토마스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성당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of St. Peter)과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주교좌성당(Santiago de Compostela Cathedral)과 함께 사도들의 무덤 위에 건립된 세 개의 성당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오늘날 케랄라(Kerala) 주에서 말라바르 전례를 사용하는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성 토마스 사도에게 복음을 전해 받았다며 스스로 ‘토마스 사도의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고 있다. 성 토마스 사도의 유해는 394년에 에데사(Edessa, 오늘날 터키의 우르파 Urfa)로 옮겨졌다가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치(Abruzzi)에 있는 오르토나(Ortona)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 토마스 사도의 순교일은 12월 21일로 알려졌으나, 그의 유해가 옮겨진 후 6세기부터 현재까지 가톨릭교회와 시리아 교회에서는 7월 3일을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리스 정교회는 10월 6일에 축일을 지낸다. 1972년에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는 성 토마스 사도의 순교 1900주년을 맞아 그를 ‘인도 교회의 사도이자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처를 만지는 모습으로, 그리고 건축가와 목수의 수호성인으로서 목수들이 사용하는 직각자를 들고 있거나, 순교할 때 사용된 긴 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출처: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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