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성 니콜라오로 알려진 미라의 니콜라오(Nicolas de Myre) 또는 바리의 니콜라오(Nicolas de Bari)는 270년경 리키아(Lycia) 지방의 파타라(Patare)에서 태어나 343년 미라(Myra)에서 사망했습니다.
Myra의 주교였던 그는 아마도 아리우스와 싸웠던 첫 번째 니케아(Nicaea) 공의회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숭배는 동방에서 6세기부터 있었고 11세기부터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서방으로 퍼졌다. 성인이 된 그는 많은 국가와 많은 거래의 보호자로 선포되었습니다. 기독교 성인전에서 인기 있는 인물 중 하나이며 정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 중 한 명입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기적으로 유명합니다.
주로 프랑스 북부와 동부에 있는 여러 유럽 국가(특히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북동부(특히 로렌과 알자스), 스위스에서는 전통적으로 12월 6일에 기념합니다.
성인의 생애와 관련하여 기록된 사실은 거의 없습니다.
니콜라오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크레타의 앤드류(720년),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스타우디온 수도원의 수도사 요한, 9세기 미카엘 대주교의 비타(Vita per Michaelem)를 포함한 비잔틴 편집물에서 나온다. 그의 전설은 10세기에 Symeon Metaphrastus에 의해 편찬되었고 중세 전기학자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성인전(hagiography)에 따르면, 니콜라스는 270년대경 리키아(Lycia)의 파타레(Patare)에 있는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인 그리스계 에피파니오스(Ἐπιφάνιος)와 이오안나(Ἰωάννα)는 페스트가 유행하는 동안 사망했습니다. 그는 미라(Myra)의 주교인 삼촌 Nicolas에 의해 Sion(Myra 근처)의 사제이자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310년 기독교 박해 당시 그는 체포되어 고문을 당합니다. 그는 상속받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이 사실은 4세기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와 가이사랴의 성 바실리우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역사적 사실로 간주됩니다. 이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전설이 만들어졌습니다.
크레타의 성 안드레아와 스투디온 수도원의 수도사 이오안니스는 니콜라스가 니케아 공의회(325년)에 참여했다고 기록합니다.
Myra에 있는 순교자의 압시디올에 있던 그의 무덤은 많은 순례자들을 끌어들였지만 11세기 이후 사라센의 습격으로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의 유골은 1087년까지 Saint-Nicolas de Myre 교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유골에서 향기로운 기름을 스며 나왔고 이 향유는 중세 유럽 전역에 알려졌습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가 패배하면서 아나톨리아는 투르크에게 넘어갔고, Nicolas가 수호성인인 여러 이탈리아 상인 도시들이 그의 유물을 가져오기로 결정합니다. 베네딕토회 수도사 니세포르와 대주교 장 드 바리는 유물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욕심으로 절도를 정당화합니다. 1087년 5월 9일, 바리에서 온 62명의 선원이 베네치아 선박을 추월하여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을 훔쳐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Bari의 San Nicola 대성당은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1089년에서 1197년 사이에 지어졌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1098년 렌의 기사 오베르 드 바랑제빌은 그곳에서 지골을 훔쳐 로렌으로 가져왔고 Saint-Nicolas-de-Port로가는 전통적인 행렬과 함께 St-Nicolas 순례의 대상이 됩니다. 유물의 일부 조각(상완골 포함)이 르네상스 시대에 스위스 프리부르에 있는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 양도되었습니다.
벨기에의 Croix-lez-Rouveroy에 있는 Notre-Dame-à-la-Croix 교회도 기록 보관소에 있는 공식 문서로 증명된 유물과 다색 목조 조각상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성 니콜라스 숭배의 가장 오래된 흔적을 찾는 것은 8세기 이전 성인들의 그림을 거의 모두 파괴한 성상 파괴운동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인이 아주 일찍부터 큰 인기를 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방교회의 도상에서 9세기부터 숭배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숭배는 1087년 그의 유물이 바리에 도착한 후 서유럽에서도 발전했습니다.
성인의 기적과 관련하여
전설에 따르면 니콜라이는 아주 어렸을 때 세례를 받았을 것이고 존경의 표시로 혼자 서서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기적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교회에서 정한 날(수요일과 금요일)에 모유 수유를 거부함으로써 금식을 시작합니다.
Lycia 해안의 폭풍우 때문에 죽기 직전인 선원들이 성인에게 구조를 요청합니다. 갑자가 성인이 배에 나타나서 그들을 안심시키고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성인은 돛 조종을 돕고 조타 장치를 잡고서 그들을 항구로 인도하고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선원들은 서둘러 Myre로 가서 점원들 사이에서 성인을 알아보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미라에 심각한 기근이 들어 주민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Nicolas는 콘스탄티노플로 가던 도중 폭풍을 피하기 위해 항구에 들어온 식량을 실은 배로 갔습니다. 그는 배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보호해 줄 것에 대한 대가로 귀한 곡식을 내어주도록 선주들을 설득합니다. 배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을 때 밀의 양을 측정했는데 하나도 줄지 않고 처음과 같은 양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계시를 받은 니콜라는 마지막 미사를 집전한 다음 자신이 대수도원장이 된 생트시옹 수도원으로 물러납니다. 그곳에서 약간의 열병이 들었고 343년 12월 6일에 사망했습니다. 그는 대리석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런 다음 신비한 소문이 신자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주교의 몸에서 향기로운 기름이 흘러 부패를 막았고, "만나"라고 불리는 이 기름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1230년경 ,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따르다가 제6차 십자군 전쟁 중에 포로가 된 로랭의 기사 쿠농 드 레시쿠르(Cunon de Réchicourt)는 감옥에서 잠들기 전에 성 니콜라스에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여전히 묶인 채 생 니콜라 드 포르 교회 계단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를 묶었던 사슬은 스스로 떨어져 나가서 본당의 기둥에 매달렸습니다.
대부분의 이콘에서
성 니콜라오(Saint Nicolas)는 짧은 수염이 있습니다. 그의 머리는 두 개의 메달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축복하시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어머니께서 그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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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오늘날 지중해 연안 터키 남서부 지역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리키아(Lycia) 지방의 항구 도시인 파타라(Patara)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뛰어난 행적으로 인한 전설과 비공식 전기 등을 통해 오래전부터 교회 안팎에서 큰 사랑을 받아왔다. 그는 파타라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막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성 니콜라우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활동에 헌신했다. 가난한 이들을 더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사제가 될 마음을 가질 정도로 그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성 니콜라우스가 사제품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미라(Myra, 오늘날 터키의 뎀레 Demre)의 주교가 선종했다. 후임자를 찾기 위해 주교들이 열심히 기도하자 어느 날 밤,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아침 성당에 맨 먼저 들어오는 ‘니콜라우스’라는 자를 뽑아라.” 다음 날 아침 성당에 기도하러 왔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주교로 축성되었다. 얼마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성 니콜라우스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면서 10여 년의 옥고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교회 재건과 이교도들의 개종을 위해 노력했고, 당시 성행하던 아리우스(Arius) 이단에 대항해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325년)에도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미라의 주교로서 뛰어난 성덕을 바탕으로 교구 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 활동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놀라운 기적을 통해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을 구해주었다.
성 니콜라우스의 선행과 기적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로는 어떤 아버지가 가난 때문에 세 딸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해 출가시키지 못하고 사랑하는 딸들을 매춘부로 넘겨야 할 곤경에 처했을 때의 일이다. 이를 안 성 니콜라우스는 그때마다 몰래 창문으로 금이 든 자루를 넣어 주어, 마침내 세 자매가 모두 정당하게 혼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기근이 든 어느 해에 고약한 푸주한이 아이 셋을 살해한 후 소금에 절여 먹거리로 팔려고 할 때, 성 니콜라우스가 이들 세 어린이를 구해 소생시킨 일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기근으로 굶주리고 있던 어느 해에 식량을 가득 실은 여러 척의 배가 폭풍우에 밀려 미라 해안으로 떠밀려왔다. 이때 성 니콜라우스는 각 배의 선장에게 얼마간의 식량을 기증해 달라고 간청해서 굶주리는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출항 후에 식량을 살펴본 선원들은 그 양이 이전과 비교해서 전혀 줄지 않았음을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그 외에도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사형에 처한 세 명의 청년을 구해주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에 나타나서 모함을 받아 위기에 처한 고관들을 구해준 일도 있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선원들을 여러 번 기적적으로 구해주기도 했다.
이렇듯 성 니콜라우스 주교는 생전에 소외되고 불행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그래서 341년경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명성은 더 멀리 전 서방으로 퍼져나갔고, 그의 전구로 많은 기적도 일어났다. 그의 유해는 원래 그가 주교로 있던 미라에 있었는데, 이 도시가 아랍의 침략을 받자 1087년 5월 9일 이탈리아 상인들이 미라의 주교좌성당에서 이탈리아의 바리(Bari)로 옮겨와 경당을 세우고 그곳에 모셨다. 그러자 많은 이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찾아와 점차 유럽 최대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래서 유해가 이장된 해에 바로 대성당 건축에 들어가 110년간의 건축 기간을 거쳐 1197년 성 니콜라우스 대성당을 완성해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가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보통 ‘바리의 성 니콜라우스’로 불리게 되었다. 성 니콜라우스 주교는 그의 행적과 여러 기적으로 인해 어린이와 누명 쓴 죄수, 폭풍우에 갇힌 뱃사람, 항해사, 어부, 여행자 등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성탄절 때 어린이들에게 성 니콜라우스의 자선과 사랑을 기리는 뜻에서 그의 이름으로 선물을 주는 관습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성 니콜라우스는 네덜란드에서는 ‘신터 클레스’(Sinter Claes), 영어권에서는 ‘산타 클로스’(Santa Claus)로 불렸다. 중세 후기 유럽 전역에서 성 니콜라우스의 축일 행사가 성대히 거행되면서, 독일에서 처음으로 성 니콜라우스가 산타클로스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산타클로스의 붉은색 옷도 사실은 주교가 입는 빨간색 복장에서 유래했다. 현대에 와서 성 니콜라우스는 산타클로스로서 대중적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이는 네덜란드계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성 니콜라우스 축일에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관습을 소개하고 이를 성탄 전야 행사와 함께 하면서부터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성 니콜라우스는 어린이와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 시칠리아, 풀리아(Puglia), 로렌(Lorraine), 러시아 등 여러 지방과 나라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도 성 니콜라우스는 그의 행적이나 기적과 관련해서 보통 주교 지팡이를 들고 주교관을 쓴 채 한 손에 세 개의 황금 구슬이 놓인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세 아이를 소생시키거나 무죄한 세 사람을 구하는 장면, 그리고 기적적으로 선원들을 구하는 모습 또한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주제이다.♧ <출처: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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