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루 생 질 성당(Église Saint-Leu-Saint-Gilles de Paris)은 파리 1구에 있는 로마 가톨릭 교구 교회입니다. 1819년 이래로 콘스탄틴의 어머니인 성 헬레나 황후의 유골을 보관하고 있으며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숭배하는 장소입니다. 1915년 프랑스 문화부는 이곳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기념물로 지정했습니다.
성당이 있는 Saint-Denis 거리는 대관식 후 프랑스 왕이 파리로 엄숙하게 입성할 때 또는 프랑스 왕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행진을 했던 오래된 왕도입니다. 최초의 예배당은 Saint-Magloire Benedictine 수도원의 승려들이 수도원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수도원을 위해 예배당을 제공하기 위해 1235년에 지었습니다.
새로운 교회는 현재의 본당 자리에 1319년에 지어졌으며 기적을 행하고 같은 날 기념된 두 성인인 Saint-Leu-Saint-Gilles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Saint-Leu-Saint-Gilles는 인근 교회가 1780년에 파괴되었을 때 성묘 기사단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1819년 성묘 기사단은 마른(Marne)의 에페르네(Epernay) 근처에 있는 오빌리에(Hautvilliers) 수도원에서 성 헬레나의 유물을 옮겨왔습니다. 제단 뒤 후진의 두 기둥 사이에 매달린 큰 십자가 발치에 공개 전시되었던 세인트 헬레나의 유골은 2000년 3월 17일에 지하의 기사단 무덤으로 옮겨져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주요 정면과 두 개의 특징적인 정사각형 기반 포탑과 트랜셉트가 없는 단일 본당이 있는 고딕 양식입니다. 측면 통로는 16세기에 추가되었습니다. 내부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본당보다 높은 합창단과 수많은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이 있습니다. 전체가 2층 높이의 늑골이 있는 금고로 덮여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I)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Helena)는 250년경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지방의 드레파눔(Drepanum)에서 태어났다.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여관 주인의 딸이었다. 그녀는 270년경에 후에 황제가 된 로마의 장군 콘스탄티우스 1세(Constantius I)를 만나 현격한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였다. 그들은 280년경 나이수스(Naissus)에서 외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콘스탄티누스이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1세는 289년에 정치적인 이유로 성녀 헬레나와 이혼하고, 그리스도교 박해자 중 한 명인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하여 292년에 황제 휘하의 카이사르(Caesar)가 되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성녀 헬레나는 당시 박해를 받고 있던 그리스도교에 대해 알게 되었다.
306년 콘스탄티우스 1세가 오늘날 영국의 요크(York)에서 죽자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황궁이 있는 독일의 트리어(Trier)로 모셔와 그녀를 ‘아우구스타’(Augusta), 즉 황후라 부르도록 하고 그녀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였다. 312년 10월 12일 ‘밀비오(Milvio)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고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로 입성하였다. 그리고 60세가 넘은 어머니 헬레나를 설득해 세례를 받도록 했다. 성녀 헬레나는 개종한 순간부터 신앙생활에 전념했고,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의 노력에 힘입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 ‘밀라노(Milano) 칙령’을 반포하여 로마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투옥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를 석방하며 빼앗은 교회 재산을 반환하였다.
326년 총애하던 맏손자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두 번째 부인을 잃는 가족의 비극을 겪은 후 성녀 헬레나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티나로 순례를 떠났다. 에우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그녀는 ‘왕 중의 왕’이신 하느님께 충성과 신앙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녀는 막대한 후원금을 내놓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선행에 헌신하며, 그리스도교의 일을 돕는 데 적극적이었다. 특히 구세주의 발자취에 대한 경배를 표하기 위해 아들의 도움으로 예루살렘 성지 곳곳에 수많은 성당을 세웠다. 대표적으로 베들레헴의 ‘주님 탄생 기념 성당’과 올리브 산의 ‘주님의 기도 성당’을 짓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루살렘의 골고타 언덕에 ‘주님 무덤 성당’(성묘 성당, Sacrum Sepulchrum)을 건립했다.
루피노(T. Rufinus, 345-410년)가 전해주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 따르면, 주님 무덤 성당을 지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십자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무수히 많은 십자가가 발굴되자 성녀 헬레나는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기 위해 한 젊은이의 시체를 모든 십자가 위에 올려놓게 했는데, 그때 한 십자가 위에 올려놓았을 때 그 젊은이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참된 십자가를 발견한 성녀 헬레나는 이를 셋으로 나눠, 하나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보내고, 하나는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마카리우스(Macarius, 3월 10일)에게 주고, 남은 부분은 로마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성녀 헬레나의 상징은 십자가이며, 이콘에서 십자형의 십자가를 들고 있는 성인은 오직 헬레나뿐이다. 교회 미술에서도 그녀는 보통 왕관, 성당 모형, 십자가, 못과 함께 등장한다. 성녀 헬레나는 330년 8월 18일 오늘날 터키의 이즈미트(Izmit)인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사망하여 라비카나 가도(Via Labicana)의 화려한 무덤에 모셔졌다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사도 교회의 황실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함께 5월 21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가톨릭 정보 - 굿뉴스>
댓글